'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파스빈더의 영화제목으로서 내가 즐겨 사용하는 문장이다. 사장 노릇을 처음 하는 이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 현실 도피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불안은 현실을 애써 외면하게 한다'


성공을 자신하는 아이템으로 희망찬 미래를 확신하며 몇 명의 동지들과 의기투합해서 창업의 험난한 길을 나선다. 1~2년 정도는 맨땅에 헤딩하며 어렵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현실과 맞서 나간다. 그러나 생각한 일정과 현실의 간극이 커지고 시장의 호응이나 매출이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기의 자신감과 용기는 가랑비에 옷젖듯 점점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러다 안되면 어쩌지?'하는 불안감이 무시로 엄습하고, 월급날이 보름에 한번 돌아오는 듯하다. 벌어서 갚으면 되지라는 호기로 기보, 신보, 은행, 캐피탈 등등에서 빌린 채무들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주 불안해진다. 


이런 때일수록 뜻을 함께 한 이들과 더 자주 얘기를 나누면서 우리의 아이템, 사업방향, 전략, 조직, 인원 등에 대해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걱정이 들면 그 걱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흔들리면서 다져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때다. 그게 창업멤버의 장점이고, 그래야 소망에 근거한 낙관적 예측으로 때를 놓치고 시간과 돈만 낭비하는 시행착오를 막을 수 있다. 

뜻을 함께 한 멤버들과 신뢰에 기반한 냉정한 논의와 평가는 각자 암암리에 불안을 느끼고 있을 때 더욱 필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시기에 상황을 악화시키는 쪽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흔히 보인다. 불안함을 달래는 현실도피. 

불안한 현실, 불확실한 미래로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아두기 위해 이것저것 돈된다 싶은 아이템들을 하나씩 늘리기 시작한다. 지인의 추천으로, 누군가의 협력 제안에,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로, 사업분야를 늘려나간다. 


아무리 사업이 운칠기삼이라지만 최소한의 시장 분석, 매출전략, 역량 분석 등도 하지 않고 '느낌적인 느낌'으로 벌인 사업이 잘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국 아까운 시간과 돈만 낭비하고 헛되이 세월만 흘러간다. 불안감도 비례해서 커져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이루어진 사장의 독단적인 결정과 집행으로 멤버간의 오해와 불만이 쌓여간다는 점이다.  


고독은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있지만 외로움과 불안은 조직을 갉아먹는다. 여기에 구성원간의 불통과 불화까지 더해지면 조직은 기반부터 무너진다. 

결국 어느 시점에선가 쌓이고 쌓였고 참고 참았던 불만이 터져 나온다. 

'도대체 창업멤버인 우리는 뭐길래 사장 멋대로 일을 벌이고 성과없는 아이템만 가져오는가?', '뜻을 함께 하고 같이 하겠다는 약속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때가 가장 큰 위기이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면서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고, 사장은 사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것은 불안을 혼자서 싸들고 앉아 있는게 아니라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는 자세에서 시작된다. 신뢰와 겸손이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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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티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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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근무하던 회사의 사장은 매우 뛰어난 개발자였다. 전형적인 이과적 마인드로 무장된 사람이었고, 그러면서도 인문소양을 갖추고자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빠른 이해력, 좋은 아이디어, 강력한 실행력,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 논리적 사고에서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단 하나 결정적 약점은 인간관계를 맺고 풀어나가는 데 있었다. 직원과 단 둘이서 대화하는 데 상당한 부담감을 느꼈다. 대화는 그냥 얘기를 주고받고 듣고 대답하고 물어보면서 풀어나가면 되는데 왜 그럴까 이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간관계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었다. 프로그래밍은 로직을 설계하고 구성하면 정해진 답이 나오게 된다. if~then 문장처럼 이것 아니면 저것이 나오게 된다. 그게 안나오면 코드를 잘못 짠 것이다. 이런 논리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답이 없는 상황이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회사를 이끌어가야 하는 사장의 입장에서 구성원들의 다양한 성향과 관점, 갈등과 불만을 접하다보니 분명 문제는 있는데 딱히 하나로 잡히는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답이 있어서 그걸 제시한다고 상대방이 그 답에 동의하거나 그대로 생각을 바꾸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하도 이게 부담스러워 내게 면담 시나리오를 짜달라는 요청까지 하길래 만들어준 적도 있었다. 이렇게 얘기를 시작해서 이런 식으로 얘기를 풀고, 만약에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하면 이렇게 대응해라는 시나리오였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한국 교육의 특징이 논리적 사고로 답을 찾는 과정에 편중돼 있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에서도 정답을 찾으려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사기꾼이 아닌 이상 누구든 자신이 보고 판단하는 내용은 부분적 진실을 품고 있다. 함께 코끼리를 봤더라도 그리는 모양은 조금씩 다를 수 밖에 없다. 하물며 다양한 상황과 맥락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적 갈등을 한가지 답으로 제시할 수 없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더라도 두 사람이 각각 느끼고 생각하는 맥락에서는 같은 내용도 다르게 기억되고 평가된다. 


여기서 필요한 건 '경청'이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고 하는 자세 말이다. 그 사람의 모든 견해를 동의하거나 수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판단을 하기 이전에 일단 그 사람의 입장에서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느끼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말 자체만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다보면 이해와 화해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아, 저 사람은 어차피 아무리 말해도 이해를 못하는구나. 자기 말만 하는구나. 그만두자" 

십중팔구 이런 속마음을 품게 된다. 

풀려고 할수록 더 꼬여버리는 상황이다. 


대부분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가령 회식 자리에서, 워크샵에서, 또는 친구간에, 허심탄회하게 얘기 좀 하자며 술기운을 빌려 어렵사리 분위기를 만들었건만, 내게 쏟아지는 불만에 당황해하며 왜 내 마음을 이런 식으로 삐딱하게 받아들이는지 자기도 불만에 쌓이면서 자리가 파토나며 서먹서먹해지는 경우말이다.  


의도와 결과가 이렇게 딴판인 이유는 애초 접근 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너는 말하고 나는 듣고 답을 하겠다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로도 나왔던 웹툰 <송곳>에 이런 대사가 있다.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들어, 좋은 사람 말 듣지." 

아무리 논리적으로 빈틈없이 상대의 불만을 격파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의 갑옷은 더 단단해지고 더이상 얘기해봤자 소용없겠다는 생각만 굳히게 만든다. 

"역시 넌 내 마음을 이해 못하는구나..."


애초 한 뜻 한마음으로 뭉친 멤버들이라면 더욱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려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그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노력이다.  그 노력이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성공한다면 개인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고, 조직에도 당연히 성장의 기틀을 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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